정선아리랑의 유래

정선아리랑의 특징

정선아리랑 소리꾼

정선아리랑가사

 

 


 

 강원도 감자바우가 제 아무리 유명하다 하더라도 정선아리랑만큼 한국인들의 가슴 속 깊이 강원도의 서정을 연상시키는 것은 드물 것이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나 “와이리 좋노 와이리 좋노"로 시작되는 발랄하면서도 뚝뚝한 밀양아리랑이나 "문경 새재는 왠 고개인가 구부야 구부야 눈물이 난다"는 신명난 진도아리랑은 부르는 이들에게 기교나 화려함을 요구하는데 비해 정선아리랑은 누구에게나 애처로움과 유장한 느낌이 들게 한다.

 일찍이 조선중기의 인문지리학자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地)』에서 "무릇 나흘동안 길을 걸었는데도 하늘과 해를 볼 수 없었다." 고 정선 땅의 가파른 산세를 강조하기도 했다.

 오랜 옛날부터 해뜨자 해 넘어가는 두메 산골 정선 사람들은 하루하루 고달프고 쓸쓸한 삶을 정선아리랑 가락에 담아 풀어나갔다. 첩첩 산골에 묻혀 사는 설움, 시집살이에 대한 버거움, 어리거나 늙은 남편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 등을 구성진 가락으로, 때론 풍자와 해학으로 달래며 살아왔다.

 정선아리랑은 가파른 산비탈에서는 노동의 고통을 덜어주었고, 잔치 때면 어깨춤에 덩실덩실 잘도 넘어가는 소리였다. 새록새록 잠든 손자 손녀에겐 자장가가 되었으며 남녀간엔 말못할 사랑을 주고받는 언어가 되기도 했다.

 숱한 세월을 거쳐오는 동안 시시때때로 만들어진 정선아리랑 가사는 지금 채록된 것만 해도 천여 수가 넘어 세계 단일 민요 가운데 가사가 가장 방대하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그 소리 가운데는 소외되고 가난하면서도 낙천적으로 살아온 정선 사람들의 정서가 시대마다 서로 다른 빛깔로 고스란히 쌓여 삶의 퇴적층을 이루고 있다.

 정선 사람들은 이같은 삶의 소리를 '아라리'라고 부른다. 이렇다할 뚜렷한 이유가 없으면서도 아리랑 보다는 아라리가 좋다고 하는 것은 오랜 세월동안 지켜온 자신들의 소리가 다른 아리랑과는 달라도 뭔가 다르다는 뿌듯한 자부심 때문이다.

 ‘아라리'라고 불려지던 정선아리랑은 1971년 강원도 무형문화재 1호로 지정되어 강원도를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민요가 되었다.

 

 예전 같지는 않지만, 정선 땅 어디를 가더라도 정선아리랑을 듣는 일은 그리 어렵지가 않다. 처음 만난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소리를 청하면 누구나 다 못한다고 일단은 주저하지만 부르기 시작하면 구구절절 한도 끝도 없이 계속 이어진다.

 우리나라 아리랑 가운데 정선아리랑이 오랫동안 구전되면서도 명맥을 잘 이어가는데는 음악적으로도 이곳 사람들의 정서와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최고음과 최저음과의 폭이 그다지 크지 않고 음이 길게 늘어지고 단조로워 가락만 귀익으면 즉흥적으로 가사를 만들어 무한정 붙일 수 있다. 특히 가사 자체가 짧게 구성된 두 줄 짜리 형식이라는 점은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단어를 바꿔가며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게 했다.

 따라서 명확한 음계와 가사를 기본으로 하는 서양 음악과는 달리 정선아리랑은 가사 중심의 노래라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알고있는 가사에 말을 바꿔가며 제 나름대로 만들어 부르다 보니 정선아리랑을 "찍어다 붙이면 되는 소리"라고 하는 것이다.

 정선아리랑은 '긴 아리랑'과 '엮음 아리랑'으로 구성되어 있다. '긴 아리랑'은 가사가 느리고 길게 이어지는 소리로 일반적으로 말하는 정선아리랑의 구조는 긴 아리랑이다.

  정선읍내 물레방아는 물살을 안고 도는데
우리 집에 저 멍텅구리는 날 안고 돌줄 왜 몰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들리는 소리라고 해야 새소리 바람 소리 뿐이던 옛날, 정선아리랑은 삶과 밀접한 내용을 담아 소재로 해서 불려졌다. 따라서 정선아리랑 가사의 내용은 대부분이 남녀간의 사랑과 그리움, 시집살이의 고됨과 서러움 등이었다. 혼자 부를 때는 청승맞으리 만큼 느리고 구성진 소리지만, 여럿이 돌아가면서 부를 때는 해학적이고 원색적인 가사를 자진 가락으로 흥에 겨워 불렀다.

 흔히 정선아리랑의 후렴으로 생각하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는 가사 뒤에 일정하게 따라붙는 후렴(Refrain)이 아니었다. 소리를 둘이서 메기고 받다가, 또는 여럿이 한마디씩 돌아가며 부르다가 갑자기 가사가 막힌 사람이 판을 깨지 않기 위해 자기 순서가 되어 “아리랑 아리랑 아리리오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불렀다. 이 때는 같이 자리한 모두가 함께 불러주어 나누고 어울리는 소리가 되게 했다.

 긴 아리랑 가사에 다 담지 못하는 삶의 응어리는 사설을 이야기하듯 촘촘하게 엮는 ‘엮음아라리’로 불렀다.

  우리 집의 서방님은 잘났던지 못났던지
얽어매고 찍어매고 장치다리 곰배팔이
노가지나무 지게위에 엽전석냥 걸머지고
강릉 삼척에 소금사러 가셨는데
백복령 구비구비 부디 잘다녀오세요

영감은 할멈 치고 할멈은 아치고 아는 개치고 개는 마당치고
마당 웃전에 수양버들은 바람을 휘몰아치는데
우리 집에 저 멍텅구리는 낮잠만 자네


 앞 부분은 사설로 촘촘 엮어가다가 뒤(밑줄 친 부분)에서는 다시 긴 아리랑 가락으로 부르는 엮음 아라리는 서양음악의 랩과 거의 다를 바 없는 해학과 흥겨움의 골계미를 갖추고 있다.

 정선아리랑은 세상살이의 온갖 시름을 다 담아낼 수 있는 커다란 그릇과도 같다. 이 같은 사실은 음악적인 형식이나 천여 수가 넘는 가사의 내용을 눈 여겨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정선은 아리랑의 고장이다. 백두대간이 등줄기를 곧추세운 강원도 땅 곳곳에 정선아리랑 가락을 닮은 소리들이 많지만, 정선 땅에서만큼은 ‘아라리’가 들꽃 향기를 낸다. 정선 땅에서는 누구나 소리꾼이 된다. 깊게 패인 노인들의 주름살도 아라리 가락을 닮았고, 빼곡한 산자락과 그 사이를 에돌아 흐르는 강줄기도 아라리 가락을 닮았다.

 투박하고 애처롭게 두메산골 사람들의 삶을 담아내던 정선아리랑은 오랜 세월을 두고 자연스럽게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갔다. 산을 넘고 물길을 따라 곳곳으로 흘러가 그곳의 문화적인 특성이 더해져 또 다른 이름의 아리랑을 낳았다.

 출가한 남녀, 소리꾼, 장돌뱅이, 화전민 등등 사람의 발길은 정선아리랑을 자연스럽게 확산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정선 뗏목의 이동은 정선아리랑을 한강 주변 곳곳에 울려 퍼지게 했다. 정선 아우라지를 출발해 서울의 광나루와 마포나루에 이르는데 보름 남짓 걸리는 한강은 정선아리랑이 흘러가는 거대한 물줄기였다.

 정선에서 일천 이백 리 한강 물길을 타고 내려가는 동안 떼꾼들은 적막감을 달래고 무사한 운행을 속으로 빌며 아리랑을 불렀다. 타고난 소리기질을 갖춘 떼꾼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또 다른 소재가 되어 아리랑 가사로 술술 이어져 나왔다. 강가의 주막에 들러서 거나한 술판을 벌이며 불러대던 소리도 정선아리랑이었다.

 “황새여울 된꼬까리 떼 무사히 지났으니 만지산 전산옥이야 술상차려 놓게”라는 가사가 생겨날 정도로 이름난 영월읍 거운리의 만지 전산옥이 머물던 주막에서부터

 영월 덕포, 단양 꽃거리, 제천 청풍, 충주의 목계 달천, 여주의 이포, 양평의 양수리, 팔당 광나루 뚝섬 서빙고 노량진 마포 등지는 밤만 되면 정선아리랑이 울려 퍼지던 곳이었다.

 한 때는 정선에서 내려오는 뗏목의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 먼발치에 뗏목의 모습이라도 보이면 객주 여자들은 언제 배웠는지 정선아리랑을 불러대며 유혹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뗏목은 강변 사람들의 삶을 윤택하게 했고 그 생활경제권 속으로 드나들던 사람들의 몸은 정선아리랑에 쉽게 젖어 들었다.

 한반도를 동서로 가르는 남한강을 수놓았던 떼꾼과 나루를 중심으로 형성된 경제권은 정선아리랑이 우리나라 수많은 아리랑과 민요에 영향을 준 주인공이요 터전이 되었다.

 우리나라 아리랑의 뿌리가 되는 정선아리랑은 이제 정선에 머문 소리만은 아니다. 한국인이 머문 공간이면 그 구성지고 애잔하면서도 해학적인 정서로 인해 쉽게 빠져드는 소리로 사랑을 받고 있다.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스스로 넘어 가기에도 벅찰 만큼 느껴지던 고개를 넘기 위해 시름겨워 부르던 정선아리랑은 어느덧 아리랑 아리랑 고개를 잘도 넘어가고 있다.

*참고문헌

 진용선, 『정선아리랑 찾아가세』, 다음, 1997.
 진용선, 『정선 뗏목』, 정선문화원, 2001.